강릉이야기

새벽에 대관령을 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습관이다.

세널리 2010. 9. 18. 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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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령은 강릉에 들어서는 첫 관문이며 어느 누구도 이곳을 지나지 않고는 들어올 수가 없다. 또한 대관령은 강릉에 있어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대관령은 강릉 단오제의 원류인 대관령산신과 국사서낭신을 모시는 산이며, 강릉시민의 노래 혹은 모든 학교의 교가에 대관령이 등장할 정도로 강릉의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하고 있다.


과거에는 아흔 아홉고비를 돌아서 오르고 내렸지만 지금은 새로운 도로가 생겨 그 옛맛을 즐기지 못한다. 사실, 옛길을 타고 대관령을 넘다보면 강릉 도심과 경포바닷가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오는 장관을 접하게되고, 무엇인가 내몸의 피를 뜨겁게 데워주는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때의 대관령이 그립다. 지금도 갈수는 있겠지만 인간이 간사해서 편리한 길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새벽에 대관령을 넘는 습관이 만들어진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생활하고, 결혼 후 가족을 이루게 되면서 시작되었다.  첫 번째 이유는 강릉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은 욕심이다. 두 번째는 막히는 영동고속도로 사정을 너무 잘 알고 있기에 교통체증을 피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다. 그러나 가장 결정적 이유는 부모님 그리고 강릉에 있는 형제, 친구들과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 때문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생겼다. 2001년 노무현 후보 캠프에 참여하면서 시작되었다. 정치권에 참여하면서 내가 태어나고 자란 강릉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새벽에 대관령을 넘는 습관은 굳어져 갔다.


2002년 노무현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노무현 캠프에서 일했던 젊은 동지들이 2004년 총선을 준비하기 위해 자기 출신지역으로 내려갔다. 많은 동지들이 청와대, 정부기관, 정당을 향할 때 나는 내 고향 강릉을 선택했고 그때부터 강릉에 대한 고민과 관심은 남달리 깊어져 갔다.


2003년 당시 35세의 나이로 강릉에 내려와 강릉경찰서 앞에 ‘참여시대 강릉포럼’이란 사무실을 냈다. 나는 준비위원장을 맡아 지역발전을 도모하는 포럼 조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새로운 강릉 새로운 정치’라는 슬로건을 앞세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났고 강릉 현안에 관해 열심히 공부했다. 그러나 일이 순조롭게만 진행되진 않았다. 많은 측면에서 나의 준비가 부족함을 절실히 깨달았고, 이러한 고민을 시작할 즈음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새천년민주당이 분당 지경에 이르렀고 새로운 정당을 창당하기 위해 옛 동지들이 하나 둘씩 모이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강릉에서 힘이 부치고 있던 차에 동지들이 다시 한자리에 모인다는 반가운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다. 그리고 2004년 총선을 위해 다시 강릉으로 내려오려던 계획은 수정되었고, 열린우리당 창당작업에 뛰어 들게 되었다.


당시 나는 열린우리당 창당기획단에서 이해찬 창당기획단장과 함께 창당 작업에 참여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기획, 당헌당규, 당명, 로고, 당가 등 창당에 필요한 많은 일들을 책임지고 진행시켰다. 새로운 것을 창조한다는 것은 참 보람 있는 일이다. 지금도 그때의 자부심이 남아있다. 많은 사람들이 아쉽게 생각하겠지만 우리당의 해산은 지금도 매우 씁쓸하다. 청와대 정무팀에서 열린우리당의 해산과 분열을 막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기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러나, 강릉에 대한 관심을 멈춰 본 적이 없다. 때와 장소를 막론하고 무엇을 하고 있던 나의 절대적인 관심은 강릉이 되어왔다. 강릉을 더 자주 내려오게 되고, 많은 사람과 강릉 문제를 논의하고, 강릉 현안들에 빠짐없이 관심을 가져왔다.


그러다 보니 주말과 휴일을 강릉에서 보내는 경우가 늘어났고 일요일 새벽에 대관령을 넘는 일은 오랜 습관으로 굳어진 것이다. 이런 나의 습관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은 주말이나 휴일 이후 심한 휴유증에 시달리곤 했지만 요즈음은 아내와 아이들도 굳어진 습관때문인지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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