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이야기

[볼거리 100선 ②] 초당마을- 잃어버린 낙원, 잊혀진 인재들의 땅 -

세널리 2016. 11. 14. 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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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에서 세계로

볼거리를 떠올리면, 경이로운 자연 경관이나 랜드 마크와 같은 현대적 구조물 혹은 유네스코 등에 등재된 유·무형적 문화 자산 등을 생각하기 쉽다. 강릉시가 강릉 단오제, 경포대, 선교장, 소금강 등을 자랑거리로 꼽은 것도 이런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수 있다. 디즈니랜드나 유니버설 스튜디오는 아니더라도 경쟁력 있는 워터 월드 등의 현대적 유흥 시설물을 유치하고자 애쓰는 것도 동일한 맥락에서 고려될 수 있다.


경포호수


대하드라마나 유명 한류 배우가 출연하는 드라마의 ‘세팅’장을 확보하려는 것도 별반 차이가 없다. 좋은 취지일지 모르나 상당한 희생이나 요구 등을 감당해야할지 모른다. 지금 당장 G20 정상들을 끌어당기는 동백섬이나 누리마루를 강릉에 이식할 수 있을까? 빙상 도시를 꿈꾸기 위해 얼마나 희생하고 인내했는지는 뒤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엄청난 예산을 자신의 ‘변방’이라 여기는 곳에 쏟아 붓기에는, 솔직히 국가의 여력이 없어 보인다.


인문사회와 예술이 감동을 주고 음식문화가 ‘모티브와 테마’를 주는 볼거리가 현실적 대안일 듯싶다. 이런 일환에서 초당마을을 시공간적으로 특수하게 재형성하고 이렇게 재구성된 이야기를 통해 그 마을이 소외된 현대의 삶에 여유와 치유를 선사하는 관광휴양 공간으로 재발견되기를 바란다. 달리 말해, 지극히 기본적이고 지엽적인 것이 범지구적인 것이라는 관점에서 초당마을에 다가가고자 한다.


초당, 두부마을 이상의 생활공간


초당두부로 세상 어느 곳과도 견줄 만큼 유명한 마을이 초당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두부라는 음식문화만으로 설명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공간이기도 하다. 경포 호수의 남쪽과 바다로 내달린 화부산 자락 사이에 걸터앉은 생활공간이 초당마을이다.


과거에는 그 마을 앞으로 남대천 일부가 지나면서 강문교 앞 바다로 흘러갔었다고 한다. 남대천 양면에 솔숲이 우거졌고 바다에 접한 면에는 해당화가 붉었으리라 짐작된다. 수묵화든 채색화든 배경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다.


고기든 세월이든 낚고 있는 어부들 풍경을 강릉의 대표적 정취로 한때 묘사했던 것은 과장이 아닐 듯싶다. 지금도 초당마을은 소나무 숲으로 유명하다. 아마도 벌목을 금지했던 탓일지 모른다. 초당두부 촌락이 솔숲 사이에 군집하면서도 솔과 벗한 모습은 과거의 유전이고 생태친화적인 미래의 단면이 아닐까 싶다.



금방이라도 신선이 출현해도 아쉽지 않을 풍경에 못지않게 두드러진 것이 초당마을의 생활환경일 듯싶다. 선사시대 이래의 유적과 문화유산들은 얼마나 초당마을이 사람 살기에 적합한 환경이었는지를 반영한다. 고고학적 연구는 초당마을이 경포 호수를 둘러싼 대규모 집단 주거지 혹은 동해 바다의 해안 사구 지역에 형성된 거주지 일부였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도 그 마을은 한반도에서 직업의 분화가 언제 일어났는지를 알려주는 선사시대 생활유적들을 잉태하고 있다. 아직도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예국(濊國)의 철기 문화에서 신라의 고분문화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유적들이 분포하는 공간이 초당마을이다.


또한 경포팔경 대다수를 즐기기에 적절한 지리적 위치 탓에, 그 마을은 교육, 교류 및 풍류를 위한 누각과 정자 문화를 꽃피우는 온상이었다. 죽도봉과 더불어 월출을 즐기기에 좋았다던 환선정이 단적인 예이다. 또 다른 예는 현존하지 않으나 한국 최초의 사설도서관으로 알려진 호서장서각 (湖墅藏書閣)이다.


죽도봉
환선정


이렇듯 초당마을은 하회마을, 양동마을, 한옥마을 등과 비견해도 부족하지 않다. 하지만 주요한 대중교통 수단인 버스 노선도에도, 관광 안내 책자 등에서도 접근하기 어려운 공간이 되고 있다. 심지어 과거 문화유산들의 흔적은 발견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방치되어 있고, ‘최상순 가옥’처럼 문화재로 지정된 문화유산들조차도 폐허가 되고 있다.


오대양을 횡단하든, 대관령 등의 영을 넘든지 상관없이 강릉을 방문하는 손님들에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보여주고 싶어 하며 보여줄 수 있는가? 초당마을은 그런 질문에 대해 나름의 방식으로 반응하는 생활문화 공간이면서 동시에 특정한 해답을 제시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특수하게 재설정된 대표적 예이다. 오늘은 초당이란 지명이 어디에서 유래했는지를 조명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자 한다. 그런 노력이 아마도 지극히 기본적인 출발점이면서 동시에 세계 문턱에 깔린 발판으로 기능할지 모른다.


초당 그 연원에서 미래의 청사진으로


삼국지연의든 그 아류 문학이든 주인공에 근접한 인간 군상들 중 하나가 제갈량이고 그가 살던 융중산 와룡강 근처[현 후베이성(湖北省) 샹양시(襄陽市) 남서부 일대]의 초당 혹은 초려에서 초당마을의 지명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즉, 초당마을에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예를 다했던 유비의 겸손과 인내가 깔려 있으며, 천하를 삼각 구도로 재편하고 재통합하려는 거시적 계획과 대책을 제시했던 와룡의 냉철한 지혜와 기상이 서려 있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초당에는 천상과 천하를 넘나드는 시적 감성이 배어 있을 성싶다. 당대 이백과 어깨를 나란히 한 두보 역시 초당에 살았다. 쓰촨성 청두 외곽에 있는 완화계 浣花溪 에 지은 ‘완화초당’을 말한다. 평화의 순간을 보낸 곳이다. 그의 시는 역사사회적인 성향을 고스란히 담았기에 시로 표현된 역사라고 불리기도 한다. 두공부초당시전(杜工部草堂詩箋) 등으로 조선 사대부들에게 소개됨으로써 그의 시는 한국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경포 호수를 둘러싼 수많은 누정에서 두보가 살아있었음을 예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초야에 묻혀 살았었든 입신양명을 꿈꾸었든지 간에 선비라면 누구나 초당마을의 지리 문화가 완화초당의 그것과 버금가리라 상상했을 법하다. 이것이 지명이 유래한 배경들 중 하나였지 않았을까? 세계경제 속에서 성장하는 중국과 몰려오는 중국 자본 및 관광객을 고려하면, 새로운 그림이 그려질지 모른다.


초당을 짓고 후진을 가르쳤던 사람들 역시 지명 유래와 무관하지 않을 듯싶다. 특히 본관이 고흥인 유동양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참고할 자료들이 충분하지 않은 탓에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고흥 유씨 종친 자료에도 그 일가의 과거시험 합격자 명단에도 없는 것으로 보아 그의 관직조차 가늠하기 쉽지 않다. 단지 그의 존재나 배경을 추정할 수 있는 단서들은 대략 다음과 같다. 즉, 어우야담 저자, 유몽인 혹은 어우당의 조카이자 취흘집을 쓴 유숙 등이 동시대 활약한 종친이라는 점; 그들과 허균이 교류했으리라는 점 등이다.


사실 유숙은 당쟁을 조장하고 나라를 그르치는 “원흉”으로 이이첨을 비판하면서 허균 역시 일종의 ‘방조죄’로 귀양 보낼 것을 주장했다. 고려할 점은 정당한 절차 없이 허균이 죽임을 당할 즈음이었다는 것이다. 정치적 격변기였음을 감안하면, 그들 간 복잡한 관계의 미로에 빠지는 것은 피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 모두의 공통분모에서 보듯, 유동양 역시 신선사상이나 은둔사상에 몰입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렇게 중첩된 인연의 실타래가 그를 초당마을로 이끌었으며 그의 사상과 교육적 기여 때문에 그의 일가가 강릉에 정착하기 용이했던 듯싶다. 초당마을에 등장했던 다양한 종류의 초당이 훗날 그 마을을 ‘깨어있는’ 교육문화의 산실로 연결하는 초석으로 기능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
허균 허난설헌 생가터


한편 허초희와 균의 아버지, 허엽이 “자기가 살고 있는 집을 겸손하게 낮추어 누추한 곳에 산다”는 뜻으로 초당을 호로 삼으면서 그 지명이 유래했다고도 한다. 그가 지천명에 이르렀을 때 얻은 늦둥이 허균의 호가 교산이란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아, 초당 역시 지명이나 어떤 형태로 존재했었고 거기에서 호를 택했을 공산이 크다.


사실 동북아 전쟁들을 전후한 시기에, 호는 대부분 거처하거나 인연이 있었던 곳, 혹은 학문을 배우거나 가르친 곳 등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 외에도 자신이 지향하는 뜻이나 좋아하는 사물들 역시 호를 반영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엽의 정치적 행보에 비추어 볼 때, 그의 호에 인생관이나 수양 목표 등을 적용하기에는 어려움이 많다. 오히려 초당마을에서 생활한 그다지 길지 않았을 세월이 허엽에게 끼친 영향을 염두에 두는 것이 바람직할 듯싶다.


즉, 초당마을은 그에게 정치적으로나 가정적으로 또 다른 전환점을 제공했을 성싶다. 예컨대, 허초희와 균이 태어났고 정치적으로 복직되었다. 그런 탓에 초당이 호로 사용되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초당마을은 허난설헌과 균이 함께 보냈던 ‘시공간’을 여전히 잊지 않은 듯하다. 그 시공간이 방문객들의 발길과 눈길을 사로잡는 새로운 명소로 정착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념공원을 둘러싼 ‘안초당’은 연꽃이 떠 있는 지세를 띈 솔숲으로 유명해서 예나 지금이나 소풍 가기에 아주 좋다.


권촌에서 본 안초당


다른 한편, 자신의 선조들이 ‘초당’을 짓고 살면서 지명이 유래했다는 강릉최씨 일가의 주장이 있다. 시공간적으로 변화도 있었지만, 초당마을이 강릉최씨의 거점 지역이었음에는 의문의 여지가 그다지 없다. 


세종실록지리지에서 김, 함, 박, 곽, 왕 등의 성씨들과 더불어 언급된 강릉의 토성들 중 하나가 바로 그 성씨이다. 강릉최씨는 수적 우위를 대체로 점했던 듯싶다. 그런 측면에서 오직 명주군왕 김주원 후손들만이 비견될 수 있을지 모른다. 강릉최씨 후손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했던 곳들 중 하나가 특히 초당마을이다. 문화재로 지정된 ‘최상순 가옥’은 그들의 흔적을 보여준다. 엄밀히 말하면, 강릉최씨 일족들은 대체로 경주, 강화, 그리고 전주 세 계통으로 구분된다. 각 계통이 시조를 달리하는 탓이다. 


이런 맥락에서 초당마을은 고려의 개국 공신이자 경흥부원군 최필달 후손들이 주축을 이루며 형성된 집성촌으로 구체화될 수 있다. 고려 시대 한때 강릉이 경흥이라 일컬어졌기에 강릉을 본관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했을지 모른다. 흥미로운 것은 강릉최씨의 시조가 경주 최씨의 시조 최치원의 후예였고 최치원이 강릉 근방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했다는 반복되지 않는 역사의 묘한 각운 맞추기이다. 한마디로 강릉 최씨 집성촌이었기에 초당이란 지명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이다.


이와 더불어 제기될 수 있는 것이 아마 택호일 듯싶다. 택호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그것의 사용은 아마도 이름이 운명을 좌우하고 운세를 바꾸기 쉽기에 가급적이면 직접적인 이름 사용을 회피하려는 민간신앙 등에서 비롯되었을 성싶다. 


호, 별호, 혹은 자 등을 즐겨 쓰듯, 택호 사용 역시 그 연장선상에서 이해될지 모른다. 그것은 또한 처가살이 풍속과 관계있을 듯싶다. 집성촌에서 변별력을 위한 현실적 대안이 택호였을지 모른다. ‘초당댁’ 혹은 ‘초당 최서방댁’이란 택호 등이 언제부터 쓰였는지 모르나 지명 유래를 조명하거나 더 연구하는데 적어도 실마리를 제공할 것 같다. 


택호에서 그렇듯, 강릉최씨 초당 관련설을 마냥 무시하기도 어려운 점이 있다. 그것은 그 성씨의 일반적인 족보에서 분파된 파보(派譜)나 지보(支譜) 등에 ‘초당댁’이란 좀 더 세분된 계파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초당마을의 강릉 최씨 일족들이 경포 팔경의 하나인 초당취연 – 저녁 무렵 초당 굴뚝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풍광-을 연출했으리라는 것에 만족해야 할 듯싶다.


권촌
권촌
권촌


예나 지금이나 석양 무렵의 초당 풍경을 그려내는 또 다른 부류들이 있다. 경포 호수와 강문교 사이에 ‘권촌’이란 지명이 초당에는 있다. 안동 권씨 일족들이 자리 잡은 공간이다. 안초당과 바깥초당으로 구분된 자연 부락과 동떨어져 있다. 


기다림의 미학과 좀 더 포괄적이고 형평성 있는 강릉의 미래를 재고하게 하는 상징적 공간이다. 왜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답이 어떨까? 여지도서에서 확인 가능하듯, 새로운 성씨들이 18세기 중반에 이르러서 강릉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긴 기다림 끝에 그때서야 다양한 ‘외지인’들이 ‘강릉 사람’으로 편입되었다. 그들이 강릉에 살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강릉 사람으로 인정받는데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이 걸렸다는 것이다. 그 당시 새로이 편입된 성씨들에는 안동 권씨, 영일 정씨, 초계정씨, 삼척 심씨 등등이 있었다. 


폐쇄된 사회일수록 새 구성원을 맞이하는 방법 및 절차 등이 까다롭고 제한적이기 마련이다. 새 성씨들 역시도 과거 등으로 출사하였거나 이런 사회적 성공을 기반으로 지역의 토성 또는 권문세가와 혼인 관계를 형성했기 때문에 포함되는 것이 가능했다. 


비록 제한된 면이 있었을지라도, 권촌은 강릉이 폐쇄성에서 벗어나 열린 마음으로 인재를 수용하려는 움직임을 시작했다는 하나의 상징물로 인식될 수 있다. 이런 움직임을 장려한 사람들은 어디로 갔는가? 또한 첫사랑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더 나은 미래를 형상화하는 보금자리가 권촌일 수 있다.

 

최우영 기자  bg243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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