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릉에서 두부란
강릉에서 두부란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생물학적이거나 사회문화적인 연령이나 성, 혹은 시대 등에 따라 다르게 새겨지는 추억이다. 학창시절의 통학버스 풍경에 첫사랑만큼이나 자주 등장하는 조연들이 두부 함지를 이거나 든 아낙네들이었다. 비록 그들이 아침시장에 두부를 내다 팔기 위해 만원버스에 피곤한 몸을 실었지만, 그들은 자식 같은 학생을 배려하는 ‘투박한’ 따뜻함과 농 섞인 여유로 정류장 안팎의 풍경이나 분위기를 풍성하게 바꾸곤 했다. 명품 조연 연기가 수천만 관객을 끄는 시절의 예고편이었다.
사진제공 : 초당두부마을 토박이 할머니 |
두부는 또한 책갈피로 끼워 둔 은행잎처럼 명절 같은 특정한 날을 채우고 있다. 예컨대, 하얀 김 모락모락 나는 콩물이 순두부로 서서히 굳어가고, 그 순두부의 고소함에 간장 양념을 내오시던 할머니가 계시고 그 기억의 다른 한편에서 당신을 기다리던 풍경이었다. 마찬가지로 두부에는 섣달 그믐날과 정월 초하루 정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설날 차례에 쓸 떡국에 만두를 섞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그다지 변하지 않은 강릉의 모습이다. 보통 설날 전에 만두를 빚었는데 김치와 두부는 만두 속에 필수적이었고 고기는 부수적이었다. 고기를 노래하는 아이에게 ‘두부김치’를 입에 한 숟갈 가득 넣으며 달래시던 집안 어른들이 그립다.
강릉에서 두부는 묵은 세월을 살아남은 흔적
어린 시절 추억을 만들곤 했던 개인적인 삶의 한 단면만이 두부의 전부가 아니다. 긴 역사의 흐름에서 보면 강릉에서 두부란 사회문화적으로 특수한 산물이자 양식이다. 자본과 외세 침탈이 강릉을 강타하기 전에 두부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했을지 명확하지 않다. 이색이 [목은집]에서 두부를 예찬한 것이 문헌상으로 나타난 최초의 기록이라 한다. 조선 왕조에 접어들면서, 두부는 연경사 두부나 봉선사 두부 같은 사찰음식으로 혹은 절이나 사하촌(寺下村)에 관련된 음식으로 특화되었던 듯싶다. 왕실의 극락왕생과 내세 천도를 빌기 위해 존재했던 조포사(造泡寺)에서 예를 찾을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은 그의 저서 [아언각비]에서 그 절을 언급하며, 승려들이 두부와 다른 제사 음식들을 준비했다고 기록했다. 이렇듯 조포사는 사찰이 왕실 능원(陵園)의 제례의식을 위한 기구의 일종으로 변질되거나 전락되었음을 시사한다. 다른 한편, 두부를 만드는 절이란 의미에서 보듯, 그것은 스님들이 사찰음식으로 두부의 명맥을 유지하는데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어느 스님에 따르면, 두부조림구이, 두부와 방아잎 장떡, 두부장아찌 등등은 두부가 “절밥”문화에 끼친 영향이라고 한다. 하지만 두부가 사찰음식과 민간음식을 어떠한 연결고리로 묶고 있는지는 좀 더 연구할 가치가 있어 보인다.
사진제공 : 초당두부마을 토박이 할머니 |
우연도 연속적으로 생기면 필연이라 여기듯, 강릉에서 두부는 묘한 인연의 연속성을 보인다. 초당이란 지명 유래와 관련해서 의견이 다소 분분하지만, 초당 허엽이 두부에 직간접적으로 기여했으리라는 것은 그럴 듯하다. 다만 투철한 실험정신으로 두부를 직접 만드는 과정에 참여했는지 아니면 그 과정을 이론적으로 정립하고 식솔들이나 지인들에게 소개했는지 분명하지 않을 뿐이다. 그의 자식들 중 하나인 허균이 그런 실험정신과 미식가적 취향을 유전적으로 계승했다는 것으로 짐작컨대, 초당두부 이야기에서 그들 부자를 배제하기란 어려울 듯싶다. 왜란으로 종종 불리는 동북아 전쟁 직후에, 허균은 [도문대작(屠門大嚼)]에서 미식을 주제로 다룬다. 책 제목 자체가 ‘푸줏간 문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저서는 강릉의 방풍죽(防風粥) - 방풍나물의 어린 싹을 썰어 멥쌀과 섞어 쑨 죽 -을 명물로 소개하고 창의문 밖의 두부를 별미로 꼽는다. 유학을 근본으로 삼으면서도 당시에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몰입한 탓인지 아니면 유불선이 교감하는 고향 강릉의 영향 탓인지, 허균은 사찰음식 두부를 양생 술 및 신선 사상과 결부시키고자 했을 듯하다.
초당두부마을 토박이 할머니 <사진 : 강릉뉴스> |
강릉에서 두부가 중흥을 맞는 계기를 허균이 제공했던 것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왜란과 호란 사이에 걸터앉은 시기의 강릉에는 딱딱한 두부 혹은 “새끼로 묶어 들고 다닐 만큼 단단한 막두부”가 유행했던 듯싶다. 허균이 귀양길에서 그리워한 것은 “처녀의 고운 손이 아니고는 문드러진다는 연두부”였을 성싶다. 허균 일가가 장구한 세월동안 강릉에 끼친 영향을 고려할 때, 강릉에서 두부의 다양화가 전개되었으리라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개인의 영향보다 상대적으로 더 중요한 변수가 수적 규모이다. 여전히 자료가 빈곤할지라도, 동북아 전쟁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증가된 이주민들 – 난민, 고아들, 공녀들, 전쟁 포로들 등 –이 두부의 변화에 기여했으리라 예상된다. 천일염에서 나온 간수가 본격적으로 도입된 일제강점기도 두부의 변화란 측면에서 무시되기 쉽지 않다. 강릉에서 두부를 좀 더 포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보완되거나 연구되어야 할 영역일 듯싶다.
한편,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대의 강릉에서 두부란 여성들에게 제한된 그러나 소중한 자유를 부여한 수단이었다. 그 당시 두부는 본격적으로 부업의 중심이 되었다. 특히 초당은 두부를 통해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가구들의 수적 증가를 목격했다. 가정폭력이 수그러지지 않은 상황에서, 누군가의 어머니, 누이, 혹은 할머니일 수 있는 그 당시의 여자들은 두부를 통해 발언권을 얻기 시작했고 여권신장의 초석을 형성했다. 그들 일부는 행상으로서 하룻밤 사이 멀리는 속초까지 왕복으로 걸어 다니곤 했다고 한다. 행상들이 강릉 음식문화의 영역을 어떤 식으로 확충하는데 기여했는지 조명되기를 바란다.
다른 한편 한국 전쟁 당시 두부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치유하는 음식문화였다. 그 당시 두부는 ‘동무-친구’ 진영 모두가 공유했던 맛이었다. 전장에서 어머니에 대한 추억을 떠올리며 살아남으려는 의지를 더욱 불태우기도 했을 것이며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를 자아내기도 했던 맛이 두부였다. 그런 소박한 추억이 콩으로 자라고 바다로 흘러가서 솔숲을 가꾸었으니 두부는 정성의 시간에 자연과 벗하는 공간이 어우러져 형성한 추억의 음식문화였다. 바닷물을 간수로 사용하는 탓에 깔끔하고 부드러운 자연의 맛을 특징으로 한다.
두부, 신령스러운 에너지가 깃든 음식
사진제공 : 초당두부마을 토박이 할머니 |
강릉에서 두부는 무병장수 혹은 불로장생을 상징하는 유·무형적 자산이다. 웰빙, 힐링 등의 외래어로 표현된 삶의 정수가 두부에 담겨 있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입증 가능하다. 기원전 2세기경 신선이 되고자 했던 중국의 인물이 선식으로 발명하고 민간에 전파한 것이 두부였다. 한반도에 전래된 이래로도 두부는 단순히 맛 좋은 안주나 요리일 뿐 아니라 장생의 수단으로 간주되었다. 예컨대, 이색은 ‘대사구두부내향(大舍求豆腐來香)’이란 시에서 “양생”에 더없이 알맞은 음식으로 두부를 묘사했다. 한편 상당수 의학서들은 예로부터 식치(食治) 혹은 식료 - 약을 쓰기 전에 음식으로 병을 고치거나 몸을 조리하는 것 -을 중시하였다. 이런 맥락에서, 두부는 질병을 다스리고 장생에 유익한 것으로 그려졌다. 일부 견해에 따르면, 그것은 소화를 증진하고 기를 활성화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했다. 시공을 가로질러 오늘에 이르러서도 다양한 연구는 콩의 강점을 유지하고 그것의 단점을 보완하고 가공한 것이 두부임을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면, 소화하기 힘든 콩과 달리, 두부는 뛰어난 소화흡수율과 낮은 열량으로 다이어트에 좋다. 두부가 삶을 풍부하게 하고 건강을 유지하는데 얼마나 유용한지는 그것이 세계음식 문화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는 현실에서 확인할 수 있을지 모른다. 일상적인 경험 세계에서도 두부와 장생 및 섭생의 상관관계는 분명히 나타난다. 돌이켜보면, 백세가 넘어도 정정하시던 두부 집 할머니, 온갖 세파에도 두부를 시어머니와 함께 만드시던 팔순의 며느리, 찜질방에 버금가는 생활공간들, 시루의 콩나물과 두부에 배어든 솔과 바다 향기 등은 서른 즈음까지 자란 어린소년에게 무병장수를 의미했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두부가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인류가 만들어낸 최고의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는 근거가 아니겠는가!
두부, 그 풋풋한 따사로움
강릉에서 두부는 풋풋한 훈정이고 남에 대한 배려이다. 이런 덕목을 내외국인 방문객을 맞이하는 친절과 포용의 원천으로 활용하는 것은 무척 바람직할 듯싶다. 우선 비지와 두부의 물질 관계 속에 숭고한 정신이 깃들어 있다. 우선 두부를 사면 비지를 덤으로 주는 인정이 기본적으로 두부에는 배어 있다. 그 맛은 1+1의 상업적 계산도 각박한 세태도 아닌 마음이 가는대로 사는 인간미다. ‘말이 고마우면 비지 사러 갔다가 두부 사온다’는 속담이 있다. 이는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단순히 손님맞이 전략이 아니라 타산지석으로 삼을 사람됨이자 사람살이의 근간일 수 있다는 가르침을 반영한다. 또 다른 정이나 배려가 두부에는 있다. 버들잎 띄워 나그네에게 물 건네주던 아낙의 마음 씀씀이가 두부에는 녹아 있다. 예를 들면, 제사상에 오르는 두부 음식에는 고인이 된 조상에게도 각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 같은 마음이 있고, 출소자에게 주는 모두부에는 과식이나 급체 등의 위험을 경계시키는 여인네의 섬세함이 있다. 이와 함께 두부에는 자유에 대한 염원을 실은 배려심이 깔려 있다. 작가 박완서는 ‘두부’라는 수필을 통하여 옥살이에서 갓 출소한 사람들에게 두부를 먹이는 풍습의 연원을 추정한다. 그녀에 따르면, 그런 풍습이 타인에 대한 훈정과 배려라는 두부의 덕목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콩에서 풀려난 두부가 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듯, ‘콩밥’ 먹던 감금의 공간으로 두 번 다시 돌아가지 말라는 따뜻한 훈계와 사랑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이상에서 보듯, 필자 나름으로 강릉에서 두부가 갖는 의미를 구성하고자 했다. 이것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뿐이다. 강릉의 과거를 경험했고 현재를 사는 모든 이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두부란 어떤 의미였는지 스스로 묻고 두부의 의미를 나름의 방식으로 이야기하기를 바란다. 그런 이야기를 공유하고 좀 더 체계화된 틀로 숙성시키는 그 순간까지, 당신의 두부를 말하고 연주하는 무대들 중 하나로 강릉뉴스는 봉사할 것이다. 그래서 강릉의 미래를 설계하고 그것에 유익한 방향성을 제공하기를 기대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초당두부를 온 누리 사람들의 입맛에 감동을 주고 정신과 마음에 영양을 공급하는 기획 상품으로 재발견하는 것이다. 이후 2편에선 본격적으로초당두부와 <토막이 할머니> 이야기를 할 예정이니 기대하시기 바란다.
초당두부마을 토박이 할머니에서 순두부와 두부조림 <사진 : 강릉뉴스> |
최우영 기자 bg243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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