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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준일 뭐해/살아온 이야기 17

재경강릉고등학교동문회 동문가족 대축제 다녀왔습니다.

재경강릉고등학교동문회 동문가족 대축제 다녀왔습니다. 9월 24일(토) 잠심종합운동장 보조경기장에서 재경강릉고등학교 동문가족 대축제가 있어 다녀왔습니다. 동문회에서 천연잔디구장을 빌려놓았으니 강고FC가 그냥 있을리가 없습니다. 아침 7시부터 미리 모여 자체 게임으로 미리 몸을 풀었습니다. 운동자에서 행사요원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9시즈음 동문 선후배들이 삼삼오오 찾아들기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처음으로 개회식을 운동장에 도열하지 않고 각자의 텐트에서 자연스럽게 진행했습니다. 박수 많이 받았습니다. 제가 포함된 재경 강릉고등학교 25회는 17회, 19회, 22회 선배님들과 축구경기 2경기를 했습니다. 변함없이 강릉인은 축구하면 정신 줄을 놓습니다. 미친듯이 달렸고 별 것도 아닌 승부에 집착하고 열심히 뛰었습니다..

재경 강릉고등학교 25회 경제인 소모임에서 즐거운 하루

재경 강릉고등학교 25회 경제인 소모임에서 즐거운 하루 지난 금요일 재경 강릉고등학교 25회 경제인 소모임에 참석했습니다. 제목은 거창하지만 결론은 강릉고등학교 동기들입니다. 장소는 강릉 출신 여사장(여기도 결국 동기)이 운영하고 있는 종각 근처 이키이키 덕분에 더 즐거운 식사와 만남이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은평구 재선 구청장 우영이도 찾아주었습니다.역시 경제인 모임이라 굵직한 친구들이 많이 왔습니다. 서울경찰청에 있는 광식이도 바쁜 와중에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회장, 총무는 소모임 활성화를 위해 금일봉을 들고 참석했습니다. 저는 참고로 재경 강고 25회 종신총무를 맡고 있습니다. 이번은 지난 모임 결성 후 모인 제2차 번개모임입니다.이정도면 '재경 강고 25회 경제인모임'은 성공적으로 운영되리라 믿..

강릉원주대학교 지역개발학과 박사과정을 밟다.

- 지역현안에 대한 심도있는 이해와 정책개발 노력 강릉대학교 지역개발학과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지역현안에 대한 보다 심도있는 이해와 정책개발을 위해 공부도하고 자료도 모으고자 한다. 아마도 박사논문은 강릉시의 가장 중요한 현안이나 종합적인 발전방안을 중심으로 만들 계획이며, 보다 실용적으로 만들어서 강릉시민과 쉽게 교감할 수 있도록 할 계획이다. 우선, 강릉시의 가장 중요한 현안으로 강릉시의 성장동력을 만들어내고, 강릉발전의 핵심요소를 찾아내려 노력하려 한다. 아마도 우리지역은 경포를 중심으로 국민관광단지를 형성함으로써 관광을 산업화하는 방안이 가장 중요하며, 둘째는 최소 2000명 이상의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기업을 유치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과 관광산업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저탄소이며 고..

민주당 강릉시위원장으로 다시 시작

- 민주당 강릉시위원회의 조직 재건을 위해 지난 총선 이후 지역위원장 공모에 신청했고 민주당 강릉시 위원장을 맡게 되었다. 막상 강릉시위원회를 맡고보니 강릉 민주당의 현실 상황은 너무 어려웠고 조직을 다시 재건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 각급 위원회의 건설을 통해 조직을 완성하고, 각급 조직별로 정기적인 회의와 일상사업을 만들어내는 것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과거 민주당 활동을 하셨던 분들과도 연락하고 새롭게 신규 당원들의 입당운동을 전개하며 강릉시위원회의 일상사업과 목적사업을 만들어 냄으로써 강릉에서 민주당의 존재감과 위상을 높이는 것이 시급히 요청되고 있다. 존경하는 강릉 시민 여러분, 그리고 민주당의 당원 동지 여러분 민주당 강릉시위원회를 건설하는데 많은 참여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보..

강릉시 국회의원으로 출마 그리고 낙선

흔히들 '벽보'를 붙였다고 말한다. '벽보'를 붙였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 '지도자'의 길을 가겠다는 고행을 결심하는 것이다. 정치란 국민의 꿈을 비전으로 만들어내고, 그 비전을 실천하기 위해 국민들의 마음과 마음을 연결하고 결국 하나의 통합된 힘으로 모두가 하나같이 그 비전을 향해 혼신하도록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 도전의 길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지도자의 변하지 않는 원칙과 신뢰이다. 그래서 18대 총선에서 나의 슬로건은 '창조와 통합'의 정치였다. 사람들의 꿈을 비전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창조'와 사람들의 마음을 연결하는 '통합'의 정치를 선언하고 약속했다. 지난 총선에서 나는 나를 선택해달라고 말하기 보다는 강릉시민의 자존심을 지키기위해, 강릉시민의 발 밑에서 겸손한 자세로 함께 호홉하지 않고,..

이해찬 그리고 17대 대선

2007년 9월 청와대 정무행정관을 그만두고, 강릉에 내려왔다. 이해찬대통령후보 특보로 강릉에서 이해찬후보의 승리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강릉에서 이해찬후보가 좋은 성적을 거두기 힘들다고들 했다. 그러나 나는 이해찬후보의 정치철학과 비전에 동의했고 그 누구보다 한나라당과의 대결에서 가장 본선경쟁력있는 후보로 이해찬후보를 선택했다. 그리고, 경선승리를 위해 하나하나 준비해갔다. 그런데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만들었다. 경선 최초로 강원도에서 이해찬후보가 1위를 차지했고, 특히 강릉에서도 예상을 뒤엎고 이해찬후보가 1위를 차지했다. 경선전에 우리의 승리를 의심했던 몇몇 지역선후배들과 친구들이 우리의 승리, 나의 승리를 치하했다. 나와 함께했던 친구들도 기뼈했고 나 역시 청와대를 그만두고..

청와대 정무행정관으로 일하다.

2006년 3월 청와대로 발령을 받았다. 새로운 경험이다. 국정운영의 최고 정수리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새벽 5시 혹은 6시에 출근을 시작해서 끝없는 보고서와 싸운다. 국회, 정당, 정부에서 끝임없이 돌아가는 정치상황을 점검하고, 보고하고, 대통령님의 국정운영철학과 방향대로 진행될 수 있도록 끝임없이 노력한다.매일 매일 사람을 만나고, 보고서를 읽고 쓰고 다람쥐 쳇바퀴 돌아가듯 계속되는 스트레스와 싸운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의구심이 커가고 하루 하루 떨어지는 임무를 해결하느라 깊이있게 생각하고 돌아볼 시간이 없다. 청와대에서 일한다는 것은 자신의 분야에서 훈련되고 숙성되어 있는자가 이곳에 와서 자신의 혼신을 뿜어낸 후 그 역량이 소진되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고도의 능력과 ..

강릉포럼을 준비하며

강릉포럼을 준비하며 노무현 대통령 당선 그리고 우리들은 많은 선택의 갈림길에 놓였다. 청와대에 들어가는 사람, 새천년민주당의 당직자, 정치조직을 만드는 사람, 지역으로 내려가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 등 당시 나 역시 많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지역출마를 결정했다. 겁 없는 결정을 내렸다. 그때 나이 35세였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대통령의 당선만으로 새로운 정치와 정치혁명이 가능하지 않으며, 노무현대통령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지역으로 내려가 출마하고 새로운 정치혁명과 정당개혁을 위한 노력에 참여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제기되고 많은 사람들이 지역으로 내려갔다. 결국, 나는 강릉경찰서 앞에 ‘강릉포럼’이라는 사무실을 개소하고,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얘기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 강릉의 민주개혁세력을 결집시..

전략기획통의 첫발을 내딛다.

경선을 승리하고 나는 새천년민주당 기획조정국에서 일을 하게되었다. 처음으로 집권여당의 당직자로 중앙당의 당무를 기획조정하는 전략부서에서 일을 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는 많은 두려움이 있었다. 오래된 당무경험을 갖고 있던 기존 당직자와 풋내기 당직자로써 당내에서 노무현후보의 정치적 철학과 비전을 확산하고 대선승리를 이끌기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래서 누구보다 열심히 일했다. 다른 동료들이 퇴근한 후에도 나는 오랫동안 남아 보고서와 씨름했다. 당시 만들었던 보고서의 내용은 지금 하나도 기억이 안난다. 선배국장님의 지시에 따라 무엇인가 많은 보고서를 생산했지만 아마도 나의 생각보다는 자료를 정리하고 요약하는데 더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한번은 나의 보고서 당대표에게 ..

원칙과 상식의 승리 노무현

2001년 대선이 임박하면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경선이 준비되고 있었다. 당시 이인제, 한화갑, 노무현, 김근태, 정동영 등 대선후보군들이 회자되고 있었고 이인제대세론이 서서히 일고 있었다. 당시 나는 자연스럽게 노무현, 김근태 그룹의 움직임을 민감히 살펴보고 있었고, 당시 이인제대세론에 맞서 범민주단일후보 혹은 김근태-노무현단일후보론이 서서히 머리를 들고 있을 때다. 그리고 각각의 캠프들이 서서히 구성되고 있었다. 간혹 선배들과 지인들의 캠프합류 소식들도 전해듣곤 했다. 당시 나는 확고했다. 노무현을 후보로 만들어야 한다. 88년 청문회에서 받았던 강한 인상, 지역주의 타파를 위한 헌신적 활동, 낡은 정치와의 끊임없는 투쟁 등 나는 노무현은 국민의 원치과 상식의 기반위에 있는 진정한 정치인이라는 점에 확..

결혼 그리고 지호, 지수

대학원을 다니면서 대학시절부터 사겼던 지금의 집사람과 결혼했다. 집사람은 같은 대학, 같은 학과, 같은 학번, 같은 동아리, 같은 운동조직에서 있었던 그야말로 나를 너무나 잘아는 친구이다. 눈빛만 봐도 무엇을 생각하는지 쉽게 감지할 수 있다. 십년지기 친구와 결혼한 것도 나에게 있어 큰 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크게 싸우는 적이 별로 없다. 가능하면 서로가 너무 잘 알기 때문에 서로를 존중하는 방법을 알고있다. 간혹 사소하게 다투지만 서로 양보하기 때문에 내가 삐치지 않는 이상 쉽게 화해한다. 그리고 우리 둘사이에는 벌써 10살의 남자녀석과 8살의 딸이 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아버지와 어머니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이 녀섴들을 보면 우리 속도 모르고 마냥 치기어린 장난에 투정에, ..

정보화촉진기본계획에 대한 분석

정보화촉진기본계획에 대한 분석 군생활을 마치고 대학을 졸업하기 위해 복학했다. 그리고 사회진출과 관련된 많은 고민을 했다. 사회운동단체, 언론인, 일반회사 취직 등 그러던 중 고등학교 친구들의 도움으로 스타디모임에 들어갔고 못했던 영어공부도 다시 시작하게 되고 친구의 제안으로 대학원 진학을 결정한다. 당시 고등학교 친구들 중 대학원 진학을 고민하거나 이미 진학한 친구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 친구들의 입시공부를 따라하면서 결국 대학원 시험에 합격했고 새로운 공부를 하게된다. 처음 신문방송학과를 선택할 때는 언론계 계통으로 진출할 계획을 구체화하기 위해 선택했다. 과거의 경험이 오늘을 지배한다고 나는 신문방송학과를 다니면서 ‘비판이론’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당시 하버마스는 ‘후기자본주의 분석’과 ‘..

시대정신 그리고 청년

시대정신 그리고 청년 대학 3학년 이제 학생회의 지도부에 참여하게 되었고 동아리연합회 부회장이라는 직함을 갖게된다. 그때부터 나는 학교에 유명한 싸움꾼으로 알려지고 학교에서 싸움이 생기면 항상 선두에서 그리고 어떤 때는 전체 대열을 지휘하는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3학년 봄 ‘반민자당 집회’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생애 처음 구속된다. 서울구치소로 향하는 매 순간 순간마다 떨리는 가슴을 안고 국가기관의 법적 제도적 절차에 순응하며 인간의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당시 처음으로 뼈저리게 깨달았다. 잘못된 국가권력에 앞에 처참히 깨어지는 자존심과 신념은 나를 더 단단하게 단련시켰고, 더욱 더 잘못된 권력과의 투쟁을 결의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의 용기라면 지금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다. 3개월정도의 수..

시청앞 분수대에 신발이 나뒹굴고

시청앞 분수대에 신발이 나뒹굴고 대학에 들어가고 얼마 안되서 4.19혁명 기념일이 찾아왔다. 선배로부터 말로만 듣던 데모에 처음 참여하게 된다. 그날은 정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선배들이 데모에 가면 신발들이 산더미처럼 쌓인다고 그랬는데 실제로 신발이 산더미처럼 쌓이는 것를 보았다. 말로만 듣던 백골단의 활약도 보았다. 너무나 충격적이고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차차 나도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텔레비전과 신문에서 말하던 운동권 학생으로 서서히 변모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서울가면 제일 조심해야 할 것으로 호남사람들과 빨갱이를 조심하라고 그랬는데 대학에 가고보니 그들은 머리에 뿔난 빨갱이도 아니었고 후배들을 가장 성실하게 챙겨주고 도와주며 인생을 함께 고민하는 좋은 선배들이었다. 가끔 교정에..

동회람과 전교조 선생님

동회람은 고등학교 시절 문학동아리 이름이다. 지금 생각하면 당시 글쓰기를 그렇게 싫어했는데 내가 동회람 활동을 했던 것은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아마도 낮은 수준이지만 인생과 철학적인 생각을 함께 할 친구들이 필요했던 것 같다. 그러던 중 당시로써는 매우 낯설은 사건이 생긴다. 아마도 전교조운동이 시작되기전 그 전신에 가까운 조직에 우리 동회람 선생님이 참여했고 더 이상 우리를 지도할 수 없었던 사건이다. 시인이시고 우리와 연배 차이가 많이 나지만 다른 선생님들과는 다르게 우리와 인생을 논해주시던 선생님이었는데 잘모르는 사건으로 헤어지게 되다니 당시는 금새 잊었지만 뇌리에 깊숙이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동회람은 나에게 많은 새로운 세상 소식을 전달해주었다. 매해 겨울이면 시화전을 하게되고 대학간 ..

나고 자란 강릉

나고 자란 강릉 나는 강릉에서 태어나 자랐다. 나는 세상의 중심이 강릉인 줄 알았고, 어린시절 강릉을 벗어나 본 기억이 없다. 『한여름 남대천 제방둑 비석에 칠성뱀장어를 올려놓고 깔깔대며 웃던 불알친구들..., 동명극장에서 중국무술영화를 보고 나와 남대천 제방둑에서 이소령을 흉내내며 쌈박질 하던...,가을이면 어김없이 회산으로 소풍을갔고..., 매일 밤 늦게까지 축구하다 어머니에게 회초리로 맞던 생각..., 단오장에서 야바위꾼 아저씨에게 걸려 몇푼 안되던 용돈을 털리던 장면, 처음 산 자전거를 타고 중학교 첫 등굣길을 달리던 모습, 단오제 농상전에서 강릉의 모든 시민이 모여 응원하고 피투성이 되도록 싸우던 농상고 형들의 모습, 오죽현에서 스케치북과 물감을 들고 강릉의 가을을 그리던 기억, 삼형제가 아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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